[미술이론-서양미술사]추상표현주의 작가

[미술이론-서양미술사]추상표현주의 작가


추상표현주의 작가
 




*아쉴 고르키(19051948)
아르메니아 출신의 미국화가로서 192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25년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미술 공부를 하였다. 초기에는 피카소의 영향으로 입체파 경향의 그림을 그렸으나, 호안 미로의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에 연방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공공건물의 대형 벽화를 추상 양식으로 그렸다.
1940년대에 브르통(프랑스 초현실주의 화가이고 이론가로서 1941년에 뉴욕으로 왔다)을 만나서 그의 영향으로 초현실주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호안 미로의 작품과 유사한 생물 형태적 형상을 보여주는 추상 형식을 만듦으로 자신의 양식을 정립하였다. ‘소치의 정원(1941)이 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21세기 시각예술의 p222) 1941년에 재혼 후에 버지니아 풍경 속에서 서정적인 추상 소묘의 연작을 발표하였다.
1946년에 화실에 불이 나서 대부분의 작품이 소실되었다. 그 해에 암이 발생하였고,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 고통스러워 하다가 1948년에 자살하였다.
초기에는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혼합 모방하는 작업을 하였으나, 미로와 칸딘스키의 영향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으로 자신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최후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라는 명칭을 얻었다.





  
* 잭슨 폴록(1912-1956)
1929년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지방주의 작가 토마스 하트 벤튼에게 회화 공부를 하였다.1930 대에 지방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리면서 멕시코 화가들과 벽화를 공동으로 그렸다. 이때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38-42년에 연방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대형 벽화를 그리므로 영향을 받았다. 1940년에는 웰렘 드 쿠닝과 리 크레이저너와 함께 전시회를 가진다. 1943년에 구겐하임의 금세기 미술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후에 미술적으로 도약하였다고 한다. 1937년에 알코올 중독과 신경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1945년에 리 크레이즈너와 결혼하였다. 1956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1938년경까지는 벤튼의 영향으로 작고, 구상적인 풍경화를 그렸다. (대표작 서부로 가는 길 Going West) 신경쇠약을 앓으면서도 1943년에 첫 전시회를 가질 때까지는 반 추상의 그림을 그렸다. 이때는 피카소와 호안 미로의 영향이 나타난다. 1943-44년 초에 벽화 크기의 대형 그림을 처음으로 그렸다. 1947년에는 이젤을 버리고, 뿌리고, 튀기는 (Drip & splash) 기법이 갖자기 나타났다. 이로서 추상표현주의 미술이라는 형식이 나타난다.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루면서, 모래나 유리조각 혹은 다른 이물질을 혼합하여 임파스토 효과를 표현하였다.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자동기술법) 이론을 자기의 회화에 적용하였다. 이를 제스처 회화라 불렀고, 미국에서는 액션 페인팅(그린버그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이라고 하였다.
올 오버 양식을 도입하였다. 전체 화면에서 특정 부분을 강조하지 않고 균일하게 다루었다. 이것은 부분간의 긴장을 통하여 구성을 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포기한 것이다. 서체적 또는 갈겨쓴 염료의 기호를 중심으로 모우지 않고 화면을 가볍게 가로지르면서 흐르도록 하였다. 캔버스는 회화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폴록은 대상의 환영을 없애고(형상으로 구성하지 않고) 빛만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추상을 기하학적인 차가운 덩어리가 아닌, 격정적이고 감동적으로 표현하였다. (후기의 추상 회화가 다시 캔버스를 회화에 도입하는 것은 폴록에 대한 반발로 본다.)
로젠버그의 지지를 받았으나 너무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작품 자체보다는 그의 드립핑 기법이 새로운 기법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명성에 비하여 거의 팔리지 않았고, 가격도 쌌다.(1만 불은 넘는 작품이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가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 월렘 드 쿠닝(19041997)
네덜란드 계 미국화가로 로테르탐에서 태어나서 1926년에 미국에 왔다. 이때만 해도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도착 후에 아실 고르키를 스승으로 삼고 추상표현주의 운동에 참여 하였다. 칸딘스키와 피카소 말기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인물에 관심을 가진 유일한 추상표현주의 화가이다.
1948년에 발표한 흑백 회화에서 추상적인 형태와 격정적인 감정 표현을 담았다.(비평가들은 주로 격정적인 모습의 형상을 중시하였다.) 아비뇽의 처녀들을 닮은 인물상은 증오와 사랑을 동시에 표현하였다. (여인의 이중성을 표현하였다.) 1930년대의 연방예술프로젝트에 참가하여 뉴욕 세계 박람회의 벽화를 그렸다. 이때 그린 그의 그림은 행위적인 경향이 아주 강하였다. 1953년에는 장중한 느낌을 주는 여인상 연작을 그렸다. 이후로 액션 페인팅을 강조하는 추상표현주의에서 리더가 되었다.
드 쿠닝을 유명하게 한 여성 주제의 그림은 에로틱한 상징, 흡혈귀, 출산의 여신 등으로 표현하였다. 순수한 추상이기 보다는 형태, 공간, 색채가 화면에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쿠닝은 추상적 형태라고 하더라도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고 함으로 구상적이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쿠닝의 여인화는 화가가 사물의 재현에서 해방하여 그리더라도 구체적인 형상이 자연스럽게 발견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체의 구체적인 형태를 수용하였으나 무한히 변이와 변화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추상표현주의의 명성을 떨어트렸다는 비난도 받는다.
그는 일생 동안 굳이 추상표현주의를 고집한 것은 아니었지만 표현주의만은 버리지 않았다.
 







* 마크 로스코(1904-1980)
러시아계 미국화가로 1913년에 부모를 따라서 미국에 왔다. 1921-23년에 예일에서 공부하였다. 1925년에 거의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1929년부터 사실주의 그림의 전시회를 가졌다. 1940년대 초부터 사실화에서 추상화된 생물 형태로 표현 형식이 바뀌어 갔다.
로스코는 격렬한 행동과 몸놀림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화면으로는 화가의 행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은 서로 스며드는 듯한, 커다란 색면을 배치하여 몽롱한 공간 속에 평면의 색면이 서로 떠있는 듯이 느껴진다. 큰 화면을 두, 새 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여 강력한 색채로 엷게 칠한 뒤에 크기가 더 작은 색면의 덩어리를 겹쳐서 모호하게 그리므로 색면 위에 다른 색면이 혼합해 가거나, 색면 위에 다른 색면이 떠돌아다니는 몽롱함으로 표현하였다. 거대한 하면이 신비감이 느꺼진다. 관람자들에게는 거부감이 아닌 친밀감을 준다.
로스코는 색면을 모호하게 배치한다는 기본 양식을 단순화하고, 세련되게 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로는 가장 많은 관심을 끌었다. 말년에는 자신이 잊혀진다는 데에 괴로워하다가 자살하였다.
 



* 바넷 뉴먼(1915-1970)
뉴욕 태생의 미국화가이다. 처음부터 화가로 나아간 것이 아니고, 사업, 정치, 교사 생활 등을 하였다. 1940년 대 후반에 지금까지 그린 그림을 모두 파기하고 신비적 추상이라는 독자적 양식으로 나아갔다.
19481월에 화면 전체를 단색조의 카드뮴 빛의 빨강 화면에 밝은 카드뮴 빛의 선 하나가 중앙을 가로지르게 하여 합일이라는 작품명으로 발표하였다. 단일 이미지로 가득찬 화면에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색조에 바탕을 둔 단순한 표현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추상표현주의 화가의 모임을 주선하여 토론을 이끌었고, 미술잡지인 호랑이 눈의 부주간을 맡았다. 로스코, 라인하르트,. 스틸 등의 색면화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클레먼트 그린버거는 그를 극찬하였다.







  

댓글

가장 많이 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