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론-한국미술사] 남북국시대의 미술-불교미술의 황금시대 '조각' (1)

[미술이론-한국미술사] 남북국시대의 미술-불교미술의 황금시대 '조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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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조각의 황금기
 
남북국 시대에는 중국 당나라 및 인도, 서역과의 문화 교류로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한국 역사상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불교조각도 균형이 잡힌 신체 비례와 얼굴 세부 표현이나 몸체의 양감 및 사실적인 옷주름 처리, 종교한 영락 장식의 표현 등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아미타불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 마흔여덟 가지 소원을 약속한 부처이다. 삼국 시대의 아미타불상은 대부분 선정인 또는 시무외인·여원인을 하고 있어 석가불의 수인과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남북국 시대 이후에는 전법륜인을 한 아미타불이 크게 유행하였다.




신라 사방불 형식의 수용과 전개
백제 유민들이 발원한 비상 형식의 사면불상
남북국 시대에는 신라 초기의 사방불 형식을 수용하여 좀 더 발전된 비상형식의 사면불상이 등장하였다. (비상이란, 네모난 돌에 불상을 새긴 것, 중국에서 크게 유행한 형식) 충청남도 연기군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 비상 일곱 점은 비암사 세 점을 비롯하여 부근의 사찰과 민가에 전해진다.
p.91
- 비암사 계유명 전씨 아미타삼존불비상(673)
: 연기군 일대에서 발견된 비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좋은 비상으로, 조치원 서창동 서광암에서 발견됨.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옥개석, 비신, 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앞면에는 아미타 삼존불상을 중심으로 그 위쪽과 비신의 좌우 측면에 작은 불상인 천불을 빽빽이 새겨 넣어 대승불교의 천불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 연화사 무인명 사면석불비상(678)
: 앞면에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 보상입상, 나한상을 배치한 오존불상을 새겼음. 좌우 측면에는 여래좌상, 뒷면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 비암사 기축명 아미타정토비상(689)
 
비상형식은 초기에는 정면과 뒷면을 중심으로 조각되다가 차츰 측면까지 퍼져 사방불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경덕왕의 전설을 간직한 사면석불
- 경주 굴불사지사면석불
: 8세기 중엽 등장.
경덕왕이 백률사로 가는데 산 밑에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땅을 파보니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돌이 나왔다. 이에 이곳에다 절을 세우고 이름을 굴불이라 지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굴석사라고 한다.”
이 내용은 굴불사지 사면석불이 땅에서 갑자기 솟아나왔다고 하여 불상의 신이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조성 연대가 남북국 경덕왕 때 즉 8세기 중엽, 또는 이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일반적으로 동면 약사불좌상, 남면 석가삼존불입상, 서면 아미타삼존불상, 북면 미륵보살입상과 11개의 얼굴에 6개의 팔이 달린 십일면육비관음보살상이 배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남면과 북면의 경우 도상적 특징이 일치하지 않아 현재의 부처와 미래의 부처라는 개념에서 배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면에 약사불을 배치한 것은 사방불 형식에서 처음 등장하는 예, 북면의 십일면육비관음보살상 역시 남북국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도상으로 초기 밀교의 성격이 강한 귀중한 자료)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경전에 의거하였다가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미 형성되었던 7세기 후반의 사방불 형식과 새로 유입된 밀교 도상을 함께 배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 사방불은 6세기 후반 경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남북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조성되었으며 이후 오방불 형식으로 발전하는 하나의 기반이 되었다.
 
** 석가불
불교의 창시자로 역사적 실존인물인 부처를 말한다. 그 종류에는 부처의 일생과 관련 있는 탄생불을 비롯하여 석가고행상, 항마성도상, 열반상 등과 같은 단독상 외에 석가삼존상, 석가·다보이불병좌상 등이 있다. 형상은 보통 나발로 표현된 머리 위에 육계가 놓여 있고 이마에는 백호를 갖추었으며 통견 또는 편단우견 법의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삼국시대 석가불은 입상일 경우 시무외인·여원인을 하고 좌상은 선정인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남북국 시대부터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 까지는 항마촉지인을 한 불좌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무병장수를 염원하는 불상 : 약사불상
약사불은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모든 재난을 제거하여 수명을 늘리고 복을 주는 현세 기복적인 성격이 강한 부처로 알려져 있다. 불교 수용 초기인 삼국 시대부터 병을 고친다는 영험성 때문에 약사불신앙이 유향하면서 약사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약사불의 기록 : 삼국유사, 약사여래염송의궤(중국 당대의 현장과 의전을 번역한 한역 경전 중 밀교 승려인 불공삼장이 번역한 경전)
 
남북국 시대의 약사불상은 전법륜인 또는 시무외인을 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우견 또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의 법의를 입고 있는 예가 많으며 지물의 형태도 약그릇, 약 항아리로 구체화되었다. 또한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왼손에 약그릇을 올려놓은 상이 있는가 하면, 약그릇이 없는 예들도 발견된다. 이러한 약사불상은 대체로 8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단독상 또는 삼존상으로 조성되었으며, 석탑의 1층 탑신이나 사면석불 중 동면에 위치하여 등장하기도 한다.
- 경상남도 함안군 벙어산 마애약사삼존불입상 (p.94)
-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동면 불좌상
- 경주 남산 보리사 석불좌상 고아배 뒷면의 약사불좌상
- 석조 약사불좌상 (경주 남산 삼릉 계곡에서 출토, p.95)
- 청주 탑동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과 금릉 수도암 삼층석탑 1층 탑신의 동면에도 약사불상이 부조되어 있다.
 
자비의 극치 : 밀교계의 변화관음상
대승불교 초기 신앙의 대상으로 널리 유행했던 관음보살은 대승불교에 밀교적 성격이 강해짐에 따라 십일면관음을 비롯하여 천수관음, 마두관음, 불공견삭관음, 준제관음 등과 같은 변화관음보살이 등장했다. 이러한 변화관음상은 초기 밀교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던 다라니 경전에 주로 등장하는 것으로, 관음보살의 무한한 능력에 따른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인도 힌두교 신들의 다면다비와 동물로 표현되는 방식을 수용한 것이다. 변화관음상은 관음보살의 능력과 자비를 얼굴과 팔의 수에 비유하여 형상화한 것으로, 보다 많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현세적 측면에서 밀교적 성격이 강한 보살이다.
국내 7세기 전반에 밀교가 전해진 이후 크게 발전하지 못하여 변화관음상이 유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북국 시대에 십일면관음과 천수관음상이 조성되었다.
 
십일면관음보살상
고대 인도의 베다 신화에 나오는 폭풍우와 파괴의 신인 루드라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드라는 십일황신이라고도 하는데 강력한 파괴력과 대지의 생물을 육성시키는 몬순의 힘을 신격화한 것으로 파괴와 온화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후 힌두교의 최고신인 시바가 되었다.
시바 신을 부르는 11개의 일므 중에 십일최승, 십일면로나라 등이 있어 루드라는 11이라는 수와 관련이 있으며 십일면관음보살의 성격 및 도상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11이라는 숫자의 연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는데, 11지의 불과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10품의 무명을 끊고 10바라밀을 얻은 정법명여래의 과를 설하는 데에서 유래되었나는 설이 가장 일반적이다.
11면의 여러 모습은 인도 루드라 신의 영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항상 시방세계를 관조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관음보살의 가장 큰 특성인 자비를 좀더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 기록 : 삼국유사5와 권3에 보이는데, 사찰의 탱화로 그려진 것이다.
그 밖에 일화는 p.95~96에 있음으로 한번 씩 읽어보고 넘어가자.
 
천수관음보살상(p.105)
천수관음의 신앙과 도상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천 개의 팔을 가진 자는 시바의 별명이고 천 개의 눈을 가진 자는 인드라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또 다른 점에서 힌두교 신들이 불교로 수용되면서 관음의 중생구제라는 성격과 결합되어 천수관음이라는 새로운 존상이 창안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십일면관음상보다 좀 더 주술적 성격을 띠고 있는 천수관음상에 관한 기록 또한 삼국유사3에 전해지고 있다.
경덕왕대 한기리에 사는 여자희명의 아이가 태어난 지 5년 만에 눈이 멀었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쪽벽에 그린 천수대비상 앞에 나아가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희명이라는 이름은 눈 밝음을 희구한다.’는 뜻으로 눈의 광명을 찾아준다고 하는 천수관음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 기록 : 삼국유사3, 고려시대 가정집6, 고려시대 이규보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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