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론-서양미술사]바로크에 대해서 (역사적 배경, 어원, 대표작가 등)
[미술이론-서양미술사]바로크에 대해서 (역사적 배경, 어원, 대표작가 등)
역사적 배경
르네상스 시대 후,
17세기 150여년동안 지속된 바로크.
유럽 전역에 한세기 동안 이어지는 미술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종교나 정치 그리고 과학의 영역에 있어 큰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이다.
종교개혁으로 교회에서 멀어진 민심을 돌이키기위해 감성을 자극하는 연극성 강한 환영의 세계가 펼쳐져있다.
시각적 이미지가 미치는 효력을 가장 적극적이고 잘 파악해 이용했던 시대이다.
16세기 일어난 마틴루터의 종겨개혁은 카톨릭교회의 집단적 성격에 저항해 신과 개인의 직접적인 일대 일 관계에 근간한 개별주의적 종교관을 제시했다. 루터의 종교관은 개개인이 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라는 사상이었고 당시 정서로는 가히 혁명적이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외부를 향했던 미술가의 눈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적 주제가 아닌 세속적 모티브가 나타난 시점이다.
교회와 왕을 위해 봉사하는 선전의 수단.
그 목적을 위해 강한 수식과 표현이 사용되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 다시 신앙심을 심어야했고 신의 세계를 눈앞에 보여줘야 했다.
그림, 조각, 치장벽토를 통한 벽장식의 찬란함으로 교회 내부를 장식했다. 하나뿐인 것 최고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환상적인 미술이 나타난 것이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밝힌 코페르니쿠스, 우주의 신비를 벗긴 갈렐레이 갈릴레오, 경험에 의거해 모든 불명확한 인식을 걷어 내려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
바로크는 근대과학과 근대철학이 출현한 시대이다.
시대적 역동성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변화는 사회적 불안과 긴장을 야기한다. 불안감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다. 그렇기에 기존의 틀을 과감하게 극복해내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확장하는 시대, 팽창의 시대가 바로크 시대이다.
사상, 과학,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의 영역에서 나타났던 바로크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이며 자발적인 표현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도시계획 - 환경미술
르네상스 시대 부터 움직임이 있긴 했지만 광장을 만들어 도로망을 확충한 것은 바로크 시대의 일이다.
폐쇠된 건축적 공간은 열린 공간으로 세계와 소통의 공간이 된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넓은 광장, 도시 곳곳에 분수, 언덕에서 도시 중심으로 뻗어 있는 스페인 계단..
개방적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바로크의 어원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불규칙한 모양의 진주를 가리키는 포르투갈어인 '바로코'에서 유래했다는 설.
현재 발견된 문헌 중, 바로코라는 말이 등장한 가장 오래된 것은 가르시아 다 오르타 라는 사람이 1563년 출판한 책이다. 50여년이 지나고 카스티야어 사전에 보석세공과 관련된 기술용어로 등재가 되어있고 그 의미가 '불규칙한 진주'를 의미했다.
1690년 프랑스어 사전에 바로크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1711년 프랑스의 문은 생시몽은 자신의 저서 회상록에서 바로크를 '이상하고' ' 어긋난' '어뚱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바로크의 정의
바로크 시대를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 내리는 것 자체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바로크는 오랫동안 르네상스적 규범에서 벗어난 저속하고 변질된 양식으로 취급되었다.
'바로크적 감성', '바로크적 의식' 등은 부정적 인식이 느껴지기도한다.
'바로크적' 이라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특이하고 기이한 것을 통칭하는 용어로 자리한다.
르네상스와 달리 특정한 원칙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술운동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며 르네상스를 단절하겠다는 의지로 발현된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피어난 미술현상. 이 또한 바로크적인 것이 아닐까.
르네상스, 고전주의 혹은 고전적 미술은 언제나 그것들을 규정하는 규범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크 미술은 원칙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를 한정하지도 않았다. 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고, 충동적이고 돌발적이며 격력함과 불안정이 응집되어 모든것을 가능하게 했던 바로크. 건축과 회화, 조각의 경계가 무너졌던 총체적 미술의 등장. 현대미술의 시작을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삶의 역동 그자체이며 자유에 대한 욕구, 해방에 대한 욕구로 규범과 틀에 저항, 사회적 관습보다 본능적이고 순수한 생명력이 살아있는 바로크.
세상과 삶, 미술을 규범과 원리에 옭아매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겨 인간에게 덧입혀진 이상화된 관념, 그 틀을 벗겨버리려는 것.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볼거리의 시대.
대표 작품
바로크의 진수는 건축.
바로크 건축의 파사드에는 복잡하고 장식적 요소가 넘쳐 흐르고 곡선과 곡선이 역동성과 유동성, 연극성으로 느껴진다.
이성의 질서를 토대로 발달한 르네상스의 비례, 균형, 조화, 통일 과는 다른 면모다.
베르사유 궁은 권위적이고 과시적이기도 했지만 개방성이 접목 되어 분수나 연못 정원 등의 외부적 공간이 함께 어우러진 바로크적 공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감상자의 시선을 고정 시키지 않고 걸음마다 공간 속에서 변화하는 조각을 만들었다.
2차원적 평면에 2차원적 세계를 모방하고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림은 세상을 건너보는 창으로 이해되었다.
공간감, 형태감, 입체감의 발전을 위해 많은 실험이 나타난다.
- 보로미니
- 로렌초 베르니니
르네상스 미켈란젤로가 최고의 경지로 올려놓았다면
바로크 미술은 베르니니와 함께 절정에 달함.
성 베드로 대성당
나보나 광장
조각 작품들 : 회화를 그리듯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반다이크
루벤스
*렘브란트 - 네덜란드 바로크
바로크적 회화의 절정
르네상스의 개관적 진실 추구 보다 주관적 의식표현. 이성아래 잠들었던 감성을 분출시킨 바로크 회화.
17세기 네덜란드는 황금기다. 네덜란드는 자유가 보장된 나라였다. 해상무역을 장악한 네덜란드읭 국력으로 국제적인 도시, 부유한 자본가들로 넘쳐나게 된다. 자유경쟁 미술시장이 개척되면서 플랑드르에 뿌리내려진 독특한 화풍이 만들어진다. 개신교가 뿌리를 내리면서 개인주의가 받아들여졌고 다양한 미술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술의 새로운 지향점을 탐색하는 발판으로 렘브란트 같은 화가가 탄생한 것이다.
구도와 빛을 통한 강조, 대각선 구도를 통한 동적인 화면구성, 장면의 실제감 등 카라바조로 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명함대비 등에서 바로크적 회화의 언어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툴프박사의 해부학 강의'
'야경'
바로크적 원근감으로 표현. 혹독한 평.. 이후로 노년이 안타까웠다..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의 음모'
유령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시청에 걸 그림 6m 짜리 이어지는 그림이 혹평을 받고 잘라버렸다. 현재 2m만 남아있다.
'탕아의 귀환'
감동적 드라마와 빛을 이용한 대비.
세밀함 정확성 대신 거칠고 자유로운 움직임. 물질적 형태감보다는 빛을 은은하게 퍼지듯 표현.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만의 회화적 장치를 다시 인정받게된 작품.
*카라바조 - 이탈리아 바로크
탁월한 관찰력을 지니고 이상적 미를 쥐고 흔들어낸 작가.
기존 회화의 질서를 흐트린 장본인.
주제 또한 성서나 신화의 역사적 사건보다 선술집과 같은 장소와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고상함과 아름다움이 없는 인물의 표현은 당시 충격적으로 느껴졌고 그 충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매료된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려낸 카라바조의 그림을 두고 흔히 '사실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르네상스의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평가하기엔 어렵다. 화풍이 파격적이고 급진적이었지만 유황화되고 볼륨감을 가진 조소적 인체표현과 매끄러운 표면 처리는 이탈리아 미술 규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벨라스케스 - 스페인 바로크
스페인의 대표화가로 피카소와 벨라스케스를 꼽을 수 있다.
벨라스케스는 고전미술의 이상화된 모방이 아닌 눈으로 경험한 세계를 그대로 제시한 새로운 형식의 회화를 탄생시켰다.
심오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미술은 물리적 경험의 시각 현상이었다. 신화를아름다워야한다는 미술에 대한 전통의 고리를 끊어내, 미화시키지 않았고 성인을 실제처럼 주변의 일처럼 그렸다. 고전미술의 규율에서 벗어나 관념과 상징을 걷어 내고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게한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벨라스케스의 회화에는 '객관적 사실주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고민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던 화가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필요했던 형태감으로 부터 자유롭게 했다.
간결한 붓놀림으로 본질적 형태를 잡아내고 조형성의 볼륨감대신 색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회화를 선사했다.
가까이에서 보는 그의 그림은 오직 붓질과 색의 흔적뿐.
또한 몇 개의 단순한 선이나 형태를 암시적으로 나타내어도 심리적으로 이미지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고 작품을 표현했다.
형체감의 구성없이 색과 빛으로 대상을 환원시킨 벨라스케스의 실험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으로 이어진다.
'알프리마 기법'(밑그림 없이 캔버스에 그리는 방법/빠르고 간결하고 거칠지만 느슨한 붓의 움직임으로 대상을 잡아냄)
스쳐가는 순간을 화면에 빠르게 담기위해 시도한 벨라스케스의 이러한 실험은 당시 미술 상식을 뛰어넘는 혁신.
훗날, 20세기 초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가들이 즐겨 사용한 기법이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존재한다' 라는 명제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까지 드리워졌던 사상을 이성과 합리를 통해 걷어내었다. 이런 데카르트의 철학적 사유가 인간 정신에 빛을 부여함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실제하는 모습을 그리며 리얼리즘의 문을 열어준 카라바조의 작품.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그려 리얼리즘의 새로운 장을 마련한 벨라스케스. 그는 극적인 연출과 사실주의적 기법을 지니고 있지만 카라바조에 남은 르네상스의 여운을 완전히 지우려는 시도를 보였다.
*니콜라 푸생 - 프랑스 바로크
르네상스 이후로 서양 미술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였다. 그 무게 중심을 프랑스로 서서히 옮겨온 17세기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이다.
프랑스 미술을 통틀어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다. 17세기 프랑스미술은 니콜라 푸생의 시대라고 할 정도다.
프랑스 미술에 고전적 원리를 제공함으로써 이후 200년 동안 프랑스 미술을 지배하게 될 기준을 세웠으며 프랑스의 모든 화가들이 따라야할 모범이 되었다.
17세기 바로크가 고전미술을 모두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푸생은 카라바조와 같은 '사실주의' 미술과 거리가 멀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적 미학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고전주의자'로 그만의 독보적인 고전미술계승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카라바조의 그림에는 정신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푸생의 미술은 '영원한 자연을 통해 영원한 아름다움의 원리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만들어 낸 고전적 바로크는 새로운 규범의 미술은 철저히 배제 되었고, 아카데미에서 확립한 미술의 원리는 교리처럼 굳어져가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17세기 철저했던 절대왕정과 절대주의였기에 다양성보다는 획일적으로 변해갔다.
로마의 바로크는 감성적이고 화려하고 극적이었다면 프랑스의 바로크는 고전주의적 성격을 보이며 명석하고 합리적으로 우아한 미술을 만들어 낸다. 로마의 바로크를 받아들였지만 프랑스식의 색채가 반드시 덧입혀졌으며 고전적 요소를 가미했다.
'고전주의적 바로크', '바로크풍의 고전주의'라고 일컫는다.
바로크와 낭만주의
고전주의 미술과 대비되는 양식으로 낭만주의와 바로크를 꼽는다. 고전주의를 지배한 것은 이성이고 낭만이나 바로크는 감성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성의 질서가 아닌 감성의 질서를 가졌으므로 바로크와 낭만주의는 유사한 혈통을 가지고 있는 양식이다.
바로크는 감성의 해방, 낭만주의는 감정의 표현.
바로크는 그동안의 관념에 갇혀있던 세계의 문을 활짝 열었고 시각적 폭발력을 지녔다. 모든 생명체는 약동하고 그 약동은 현란한 수사학으로 그려졌다.
낭만주의는 색채를 중심으로 초월적 신비주의와 비극성을 표현한다.
여러 양식들과 상대적 관계 속에서 바로크는 항상 새롭게 정의 될수 있다.
출처: 서양미술사 도서 외에 https://blog.naver.com/giambologna
잘읽어보앗어요^^ 다른 미술관련 이론글도 올려주세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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