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론-한국미술사] 남북국시대의 미술-불교미술의 황금시대 '조각' - 석굴암 (2)
[미술이론-한국미술사] 남북국시대의 미술-불교미술의 황금시대 '조각' - 석굴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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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불상군 (p.98)
석굴암에 조각된 불상군은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진수이며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걸작이다. 종교적 숭고미와 완벽한 조각기술은 뛰어난 예술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균형과 조화를 이룬 석굴 안에는 불·보살을 비롯하여 나한, 천부 등 모두 40존상(현재 2구는 없음)이 모여 이상적인 불국토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은 자연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으며, 석굴암같이 여러 개의 판석과 돌을 다듬어서 인공적으로 축조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1995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삼국유사》 권5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751년에 발원하여 불국사와 함께 건립하였으나 774년 김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마무리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석굴암 불상군은 8세기 중엽에서 후반까지 약 25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신라 왕실에서 발원한 불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대 일본인이 해체·복원한 것을 1960년대 문화재관리국에서 다시 복원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원래 전실의 배치 구도가 일부 변형되었다. 1910년도 사진을 보면, 석굴암 전실 좌우에 있는 팔부중상 중 끝부분에 배치된 한 쌍이 90도로 꺾어져 있어 보이지 않는데 지금은 다른 3구의 상들과 함께 나란히 4구씩 배치되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석굴암의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1960년대 이래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어왔다.
석굴암 본존불
(p.103) 석굴암 본존불은 결가부좌하고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불좌상으로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늘어뜨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근엄한 얼굴에는 종교적인 신비감이 엿보이며 어깨와 당당한 가슴 등 양감있는 신체 표현은 얇은 법의에 의해 잘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은 인도 마투라 계통의 굽타 시대 불상과 중국 당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불상 양식이다. 특히 석굴암 본존불은 중생을 압도하는 듯한 종교적인 위압감과 조화롭고 안정감 있는 모습에서 우리나라 불교조각 중 가장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본존불에 대한 명칭은 석가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등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화엄경》, 《관불삼매해경》 등을 근거로 하여 항마촉지의 수인을 하고 있는 석가불로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 원래 항마촉지인은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고 땅의 신을 불러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석가불의 수인이라 할 수 있다.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촉지인 불좌상은 남북국 시대에 크게 유행했는데, 8세기 초 군위 팔공산 삼존불상의 본존불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여 경주 남산 칠불암 삼존불상의 본존을 거쳐 석굴암 본존불에서 완성을 본 불상 형식이다. 이와 달리 조선 말기인 1882년경에 석굴암 전실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수광전’의 편액과 19세기 말 석굴암 수리를 기록한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 중 “...미타불 금강대...”라는 내용을 근거로 본존불을 아미타불로 해석하기도 한다.
본존불의 크기가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리사의 성도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석가, 앙미타, 약사불을 회통한 법신불로서의 비로자나불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촉지인상이라는 점에서 밀교의 금강계 5불 중 동쪽에 위치한 아촉불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석굴암 본존불은 항마촉지인의 도상적 특징, 불교 교리와 사상적 배경, 방위, 문헌 자료 그리고 석굴암에 배치된 여러 상들과의 관계 등에서 그 명칭을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석굴암 십일면관음상(p.104)
본존불의 바로 뒷벽에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은 남북국 시대 불교조각 중에서 특히 균형과 조화를 이룬 보기 드문 작품이다.
전면의 3상은 착한 중생을 보면 자비로운 마음을 내어 즐거움을 주는 것이요, 왼쪽 3면의 분노상은 악한 중생을 보면 슬픈 마음을 일으켜 자비로 고통에서 구하려 함이요, 오른쪽 3면의 흰 이를 드러낸 모습은 수행자를 보면 칭찬하여 더욱 불도에 정진하기를 권하는 것이요, 뒤쪽 1면의 대폭소상은 선악 모든 부류의 중생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 웃음으로써 이들을 모두 불도로 향하게 하는 것이요, 정상의 불면은 대ㅅ응의 근기를 가진 자들에 대하여 불도의 의미를 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11면의 얼굴은 중생들의 성품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면 6면 3면 1면으로 배열된 예는 서역 토육에서 발견된 7세기의 단목 십일면관음상과 중국 사천성 광원 천불애석굴의 중단 하층에 위치한 십일면관음상 등에서 드물게 볼 수 있다. 당대의 보살상에 비해 얼굴 표정이나 신체 표현에서 훨씬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국제적 불상양식의 등장과 유행
남북국 시대 불상 중에서 인도 · 서역 · 중국과의 불교조각 교류로 인한 국제적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제 불입상 및 불좌상과, 경주 감산사 절터에서 발견된 석조 아미타불입상과 미륵보살입상 등읻이다. (황복사지 금제 불입상과 불좌상은 삼층석탑 2층 옥개석에 봉안된 금동 사리함에서 발견되었다.)
황복사지 금제 불입상(p.107)
삼국시대 불상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얼굴이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약간 미소를 띠고 있다. 머리카락이 표현되지 않은 민머리를 하고 법의 주름은 끝자락이 넓게 뻗쳐 있으며 연화대좌는 단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업의의 주름이 u자형으로 발목 위까지 내려와 있는 표현이 특징적이다.
인도 아육왕이 조성한 불상 형식에서 유래된 것이다.
금제 좌불상(p.106)
근엄한 얼굴 표정이나 당당한 신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옷 주름, 정교하게 투각된 광배 등에서 사실적인 조형미가 잘 나타나 있다. 법의가 대좌를 덮으면서 옷자락 끝이 삼각형으로 늘어져 있는 점이나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 모양도 7세기 중엽부터 중국 당대 불상에서 유행했던 형식이다.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상과 미륵 보살상(p.107)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상과 미륵 보살상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광배 뒤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발원자와 조성 시기, 불상의 이름까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불상이다.
명문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때 집사부시랑을 지난 김지성이 719년에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과 함께 처와 딸, 동생을 미롯한 일가족과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위엄있는 얼굴과 넓은 어깨, 당당한 가슴, 몸에 밀착된 법의의 표현 등이 이상화된 사실적 조형미를 보여준다. 옷주름은 인도 우전왕이 조성했다는 불상형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아육왕식 옷주름과 함께 남북국 시대 불입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황복사와 감산사 불상에 보이는 이상화된 조형성이나 사실적인 조각기법 등은 8세기경 남북국 시대에 등장하는 새로운 요소로서,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 유행했던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국제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불상 양식은 경주 안압지에서 발견된 금동판불이나 경주 불굴사지 사면석불, 경주 남산 칠불암 불상군, 석굴암 불상군 등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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