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가] '텅 빈 얼굴' 화가 기드온 루빈


** 연합뉴스 / 정아란기자



기드온 루빈 그림을 표지로 내건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알라딘 홈페이지 발췌]
 
 
 
배에 탄 여자는 노를 젓고, 남자는 하모니카를 분다. 여자와 남자의 눈코입은 지워졌지만, 왠지 그들을 알 것도 같다. 두 사람의 표정, 이들에 얽힌 사연을 능히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지난해 출간된 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은 책 자체뿐 아니라 표지에 실린 기드온 루빈(45) 그림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출판사는 올여름 한정판으로 낸 재출간본 표지 또한 루빈의 작품으로 장식했다.

루빈 그림은 얼굴 눈코입을 지워내거나 신체 일부를 언뜻 드러냄에도 강한 잔상을 남긴다. 대충 칠하다 만 듯한, 무심한 붓질은 텅 빈 얼굴과 어울린다. 첫 한국 개인전 '파편들'을 위해 방한한 작가를 최근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갤러리엠에서 만나 이것저것을 캐물었다.

"우리는 누군가 뒷모습이나 걸음걸이만 보더라도 그 사람을 알아보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것과 연결해서 작업해요. 그림 속 인물들에게 얼굴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죠."

작가는 "형상이 없기에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라면서 "그 순간, 관객과 작품 사이에 다이얼로그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영국 런던에서 작업 중인 작가는 세계 각국의 옛 잡지와 신문 등을 자주 뒤적인다고 했다.

유독 머릿속을 맴도는 이미지 속 얼굴의 형상과 배경 등 '맥락'을 제거한 뒤, 그림을 완성한다. 한국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게 느껴진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표지 그림도 문화대혁명 이전 1960년대 중국의 한 연인이 주인공이다.
 

 

기드온 루빈이 처음부터 초상화에서 눈코입을 지워낸 것은 아니었다. 작가가 휴대전화를 한참 뒤적여 보여준 1990년대 작업들은 하나같이 세심한 붓질로 얼굴 미소까지도 표현해내고 있었다.

"2001년 미국 뉴욕에 놀러 갔다가 9·11 테러 현장을 목격했죠. 건물들이 무너진 모습을 본 뒤……. (그는 잠깐 침묵하더니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이렇게 사실적인 작업을 더는 할 수 없었어요."

인터뷰 내내 개구쟁이 같던 작가의 표정이 이때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이후 유럽으로 돌아온 작가는 뉴욕의 거리에 나뒹굴던 낡은 장난감들을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다. 작가는 수년이 흐른 뒤 옛 사진들을 모으고, 앨범 속 익명의 인물들을 그려내는 작업으로 작품세계를 확장해 왔다.

이번 전시에는 다양한 작업세계를 보여주는 신작 및 근작 20여점이 나왔다.

각국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쉼 없이 전시를 열어온 기드온 루빈의 작품가는 손쉽게 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박준 산문집을 위해 사용료도 제대로 받지 않고 흔쾌히 자신의 작업을 선뜻 내줬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경제적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 작가들이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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