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론-서양미술사] 20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야수파’와 독일의 표현주의 그룹 ‘다리파’의 형성 과정과 미술사적 의의.
[미술이론-서양미술사] 20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야수파’와 독일의 표현주의 그룹 ‘다리파’의 형성 과정과 미술사적 의의.
20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야수파’와 독일의 표현주의 그룹 ‘다리파’의 형성 과정과 미술사적 의의.
20세기 미술은 과격할 정도로 혁신적이어서 급속하게 교체되어 왔다.
프랑스의 ‘야수파’
20세기 전반기에는 파리에서 발생한 미술유파들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예술의 도시 파리는 현대미술의 중심지로서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야수주의는 1904~8년까지의 활동이라 미술사적인 기간으로 보면 잠깐 동안의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20세기의 첫 번째 아방가르드 사조로서 현대미술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1905년 파리에서 <살롱 도톤느>에 작품을 출품한 이래, 미술사에서 매우 중대한 전환점에 해당한다. 이후부터 예술가가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켰다. 하늘은 더 이상 푸르지 않아도 되고, 잔디는 초록색이 아니게 된 것이다. 마티스, 블라맹크, 드랭, 뒤피, 브라크, 루오 같은 야수주의 화가들의 화폭에서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하늘이 겨자 같은 노란색이었고 나무는 토마토 같은 붉은 색이었으며 사람의 얼굴은 완두콩 같은 녹색으로 그려졌다. 20세기 미술을 근본부터 움직이는 혁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대중 앞에 처음 나왔을 당시,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혹평이 쏟아졌으며 비평가 루이 복셀은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마르케의 15세기풍의 청동조각을 가리켜 ‘야수의 우리 속에 갇혀있는 도나텔로 같다’고 평한데서 유래 되었다. 추한 그림을 그려내는 야수들이라는 의미로 야수파라 불려 졌으나 이들의 도발적인 시도를 통해, 색채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야수주의 화가들은 모두 강렬하고 과장된 색채에 취해 대상을 묘사하는데 쓰이는 전통적인 색채 사용법에서 해방되어 감정을 표현하는데 색채를 사용했다. 야수주의자가 본다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개성만이 창조의 힘이 된다는 그들의 생각에서 연유한 것이고 야수주의란 테두리 안에서 각자의 개성을 발견해 내는 기회와 장소로 삼았다. 순수 독립적 색채가 중요시 되어, 원근 및 깊이감은 부수적인 것이 되었고 면과 윤곽선은 파괴 되었는데 색채와 색면과 선을 종래의 약속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거부한 야수주의가 끼친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은 훗날 현대미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비유럽적인 전통을 부족 미술품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비재현적인 색채 사용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야수주의 화가들은 점차적으로 세잔이 강조한 내부 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다음 시대 미술의 혁신을 몰고 온 입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야수주의 운동은 주관의 표현, 형식의 해방이라는 정신적 자세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20세기 미술의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추상사조에 영향을 끼쳤으며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까지도 그 흐름에 근원을 두고 있다. 특히 독일 표현주의 미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독인 표현주의 그룹 ‘다리파’(브뤼케)
독일에서 표현주의자(Expressionist)라고 자칭하는 화가들이 미술이란 실제 세계의 영상을 그리기보다는 개인의 감수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리파는 독일 최초로 아방가르드 미술을 추구한 화가 그룹으로, 1905년 6월, 공업대학의 건축과 학생인 헤켈,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슈미트 로트라프 등이 창설했다. 다리파는 단어 그대로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의 구실을 하리라는 믿음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작업했는데 극도로 왜곡된 형태와 색채의 부조화를 통해 격력하고 고뇌에 가득 찬 작품을 만들었다.
다리파가 넘고 싶었던 다리는 세기말 독일 화단을 지배하고 있었던 구세대 미술이었다. 베를린 분리파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대표적이다. 신세대 다리파는 미술의 권력이동을 요청하며 세대 간 경쟁에 도전한다. 1906년 드레스덴의 지역신문에 발표한 성명서에서 분명히 그 뜻이 보인다. “우리는 진보에 대한 믿음, 신세대 창작자와 감상자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청년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고자 한다. 우리는 미래를 짊어질 청년으로서,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낡은 힘들에 대항하여 가난과 삶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다.”
다리파는 미술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이를 위해 다리파가 주력한 몇 가지 분야가 있다. 우선 전시 개최이다. 이로써 생활공동체에서 전시공동체로의 변모는 신속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총 70회의 그룹전을 열었으니, 연간 평균 약 10번의 전시를 치른 셈이다. 대부분 여러 도시를 순회했다. 기획, 섭외, 홍보 등의 조직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06년의 첫 단독 그룹 전시는 드레스덴의 한 전기스탠드 공장이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대안공간인 셈이다.) 미술 대학에도 다니지 않는 새파란 젊은 공대생들이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다.
1906년에는 폐히슈타인, 일시적이지만 놀데도 이에 참가했고 1910년에는 베를린의 뮐러도 합세했다. 특별히 명확한 강령은 없었지만 인상주의적인 분리파(제체션)에 반대하고, 나아가 사회를 비판한다는 의향 하에 자진해서 노동자 촌에서 생활, 공동적 제작활동에 의해 표현주의 운동의 단서의 구실을 수행했다. 1906년부터 <연간 판화집 브뤼케>를 간행하였다. 이렇듯 판화와 같은 복제기술을 이용한 생산성 강화로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다리파의 판화, 특히 목판화의 이차원적 평면과 백, 흑의 대비 속에서 힘찬 정신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독자적 예술범주로 높인 의의는 크다.
전쟁이 터지기 1년전 다리파는 해체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1911년 가을, 중심 멤버들이 베를린으로 옮겨 활동한 후 다리파는 미술시장에서 환영 받는 성공한 단체로 성장했다. 8년 동안의 활동 끝에 구성원 각자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그룹의 필요성이 없어졌고 1913년 <크로니크>에 기고한 키르히너의 한 문장으로 인해 의견 분열을 가져오게 되고, 이내 해산하고 만다. 1913년 5월 27일 해체를 결정한다. 훗날, 이 화파는 20세기 표현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다리파의 ‘다리’는 독일어 브뤼케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슈미트-로틀루프가 모임의 이름을 제안했다. 당시 많은 청년들의 우상이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위대한 것은, 인간이 하나의 다리이자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사랑할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이행하고 몰락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1부 서문 4장). 키르히너는 다리를 소재로 작은 목판화를 새겨 그룹의 아이콘으로 삼았다. 다리 위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이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두 파 모두, 단지 예술가들의 내적 동요에 의한 움직임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예술의 변화와 발전 양상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표현주의 작가들의 의지는 역사적 맥락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를 함께 들여다봐야 이해가 가능하다. 비슷한 시기, 작가는 대상의 내면에 대한 근본적인 표현이며 감정의 즉각적인 분출이었다. 세상을 드러내는 방법으로써의 예술이 이제는 내면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시도를 하며,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성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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